대한제국의 의회 중추원
본문 바로가기

역사

대한제국의 의회 중추원

728x90
반응형
SMALL

아관파천 이후 환궁한 고종에게 독립협회는 입헌군주제를 주장하였고 고종이 이에 합의하면서 탄생한 한반도 최초의 근대식 의회였습니다

독립협회의 집회장이자 중추원으로 사용되었던 독립관 건물. 이곳에서 의원 선출과 선거가 열렸습니다.

고종과 독립협회는 일본이라는 요소 하나 때문으로도 공존하기 어려웠으나, 외국 눈치를 보던 고종과 이를 기회로 여론몰이를 하면서 정권을 획득하려고 했던 독립협회가 암묵적 대립을 이어갔습니다

독립협회와 대한제국 황실 및 정부가 보였던 입장 차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체제에서 독립협회는 영국식 입헌군주제를, 정부와 황국협회는 독일식 외견적 입헌군주제를 주장했습니다.

독립협회는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높고, 민심이 협회에 우호적인 서울에 한정하여 대표를 선출하는 상원만을 구성할 것을 주장했습니다.반면, 정부와 황국협회에서는 전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하원도 복설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중추원 의원의 권한에 있어서 독립협회는 법률 제정, 행정과 자문, 여론 수렴, 대신 임명권, 군주가 내리는 칙령의 개정과 폐지, 모든 지방의 건의가 군주에게 올라가는 것을 검열하는 권한 등을 모두 중추원에 줄 것을 주장했고, 정부는 특히 대신 임명권을 포함한 권한이 너무 크다는 것에 불만을 품었습니다.

중추원 의원의 구성에 있어서 독립협회는 관선과 민선으로 하되,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는 민선은 독립협회에서 선거를 거쳐서 선발하겠다고 해서 독립협회가 중추원을 장악하겠다는 의사를 노골적으로 내세웠고, 정부는 이를 정변급으로 이해했습니다.

독립협회의 이러한 주장과 함께 대립이 심화되었습니다. 현대의 입장에서는 독립협회의 주장에 그나마 말이 더 되는 측면이 있었지만, 독립협회의 세력이 미약했고 입헌군주제와 같은 서구식 정치체제가 낯설었던 당시 시대 상황에서 급진적인 주장인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황국협회

파란만장하게 성립된 만큼 그 내용 또한 정치 타협의 산물이었습니다.일단 독립협회의 주장을 기반으로 해서 대신 임명권 등이 제외되어 독일식과 영국식의 타협에서 다소 독일식에 가깝게 변하였습니다.

구성은 원래 독립협회 계열이 과반수였다가 개설될 때에는 총 50명 가운데 독립협회 계열이 17명, 황국협회 계열이 16명, 황제에 의한 직접 임명이 17명으로 독립협회 계열은 1/3 수준으로 줄었습니다.

그렇게 중추원이 개설되고 첫 의회가 열렸는데, 첫 의회가 마지막 의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한국 최초의 근대식 의회였던 중추원은 민주주의의 꽃으로 주장하기에는 너무나도 껄끄러운 부분이 많아서였는지 '설립 단계에서 무산되었다', '결국 열리지 못했다' 등으로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고는 합니다. 사실 중추원 관제 개정까지는 그리 갈등을 초래할 일은 아니었습니다

반응형
LIST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한제국 시기 들어온 근대문물들  (0) 2021.09.26
제야의 종  (0) 2021.09.26
대한제국의 황궁 덕수궁의 서양식 건물들  (0) 2021.09.25
친일반민족행위자란?  (0) 2020.05.27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0) 2020.0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