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실의 위엄과 권위 한양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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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 왕실의 위엄과 권위 한양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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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양도성은 조선 시대 한양을 둘러싼 도성입니다. 좁은 의미로는 서울을 둘러싼 성곽과 문을 지칭하나, 넓은 의미로는 성곽과 그 안의 공간을 말합니다. 조선 시대에는 줄여서 한성으로 불렸으며, 사적으로서의 명칭은 지정 당시 서울성곽으로 정했다가 2011년 현재의 명칭으로 바뀌었습니다.

4대문의 경우 숙정문은 산 속에 위치한 덕분에,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가 입성한 곳이라는 타이틀 덕분에 일제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돈의문은 헐려버렸고 그 자리에 도로와 건물이 들어서버려 현재로서는 복원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또한 안타깝게도 남대문은 2008년 숭례문 방화 사건으로 인해 옛날 그대로의 모습을 잃고 처음부터 다시 복원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벽의 높이는 현재 소실된 높은 구간은 10 m가 넘었지만 낮은 구간은 5m 남짓이었고 해자조차 없었기 때문에 전시에 방어를 기대하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적이 한양까지 쳐들어오면 한양을 버리고 도주해야만 했습니다. 임진왜란,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모두 그러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조선시대에도 이전 시대와 마찬가지로, 도성은 전쟁이나 내란 방어용 성곽이라기보다는 왕권의 상징이란 의미가 더 컸고, 실용적 시설이라는 측면보다 인의와 예를 강조하여 평온을 기원하고자 했던 관념적으로 운영된 성격이 컸다고 설명합니다.
여러 전란을 겪는 동안 한양 방위체제는 계속해서 개편되었습니다.

한양도성 전구간 출처 서울특별시

한양도성의 남쪽대문이자 서울의 상징 숭례문

숭례문

600년 동안 한양을 둘러싸고 있었던 한양도성의 남쪽에 위치한 문. 현재도 서울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울의 상징이나 다름 없는 건축물입니다.
숭례는 '예절을 높힌다'는 뜻으로, 사서 중 하나인 유교경전 《중용》에서 따온 말입니다.

남대문이라는 명칭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개명될 때 붙어진 이름으로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소문이 언젠가부터 퍼졌습니다.
이는 잘못된 오해 중 하나로, 사실 조선왕조실록 등에서도 백성들은 이미 편하게 남대문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많으며, 단어 수도 남대문이 숭례문보다 더 많습니다. 다른 분야에서도 정식 명칭과 통상 명칭이 다른 예는 매우 흔하며, 남대문 역시 숭례문의 통상 명칭으로 불린 것일 뿐입니다.

1996년 이전 촬영된 숭례문


사대문의 이름은 인의예지를 동서남북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서울의 정문들의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유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덕목인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을 기준으로 이름이 지어졌습니다.
동: 인(仁)을 기르는 흥인지문
서: 의(義)를 두텁게 하는 돈의문
남: 예(禮)를 숭상하는 숭례문
북: 원래는 지(智)를 기르는 숙지문으로 정하기로 했지만 지혜를 뜻하는 지(智) 자 대신 정(靖) 자를 썼는데, 이는 "꾀하다", "꾀"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지혜 대신 살짝 비틀어 꾀라고 지었다고 한다. 또한, 일각에서는 숙지문으로 하면 백성이 똑똑해져서 다스리기 힘들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하기도 합니다. 북은 음을 상징한다고 해서 이 문은 쪽문으로 세워졌고, 대신 지어진 '정화하는 의미인' 숙정문마저도 안 된다고 해서 통행금지되었습니다.
신(信)은 4대문 정중앙에 위치한 보신각입니다.


한양도성의 동쪽대문 흥인지문

흥인지문

한양도성의 동쪽 문. 일명 동대문입니다. 숭례문과 함께 한양도성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며, 2008년 숭례문이 불타면서, 흥인지문은 사대문 중 유일하게 조선시대에 지어진 그대로 남아있는 문이 되었습니다. 조선 태조 5년(1396)에 처음 지어졌으며, 이후 단종 1년(1453)과 고종 6년(1869)에 고쳐 지어서 현재의 모습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누각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다포식 중층 우진각지붕으로, 조선 초기의 양식인 숭례문과는 다르게 흥인지문의 누각은 조선 후기의 양식입니다. 석축 역시 숭례문에 비하면 보다 실전적으로, 반달형의 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크게 다릅니다. 이유인 즉, 흥인지문이 경복궁에서 볼 때 좌청룡으로 동쪽에 있는데, 경복궁을 사방에서 둘러싸고 있는 산들은 주산 현무봉인 북악산과 우백호인 인왕산, 그리고 안산인 남산이 높고 큰 것에 비하여 좌청룡인 낙산은 낮고 약하기 때문에 한양은 동쪽이 약해 동쪽 방향에 있는 외적의 침입을 많이 받는다고 보았습니다. 이 약한 기를 보충해주기 위해서 군사적 목적이 아닌 풍수적 목적에 의해서 옹성을 쌓은 것입니다.

80년대 후반으로 추정되는 흥인지문 모습

한양도성의 서쪽대문 돈의문

돈의문

조선시대 한양의 서쪽 대문으로 이름은 '의를 북돋는 문'이라는 뜻입니다. 조선시대 한성에서 평안도 의주까지 이르는 제1간선도로의 시발점이었으며, 외교사절이 오면 국왕이 직접 마중을 나가는, 나라의 중요한 문이었습디다. 일제에 의해 철거된 이후로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동 112에 터만 남아있습니다.

돈의문 현판 출처 연합뉴스

돈의문 철거과정에서 돈의문의 편액(현판)만은 남았는데, 창덕궁의 행각에 보관해오다가 1992년에 덕수궁 궁중유물전시관 수장고를 거쳐 2005년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이관되었고, 2014년부터 한양도성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한양도성의 북쪽대문 숙정문

숙정문

숙정문은 한양도성 4대문 중 북쪽에 있습니다. 1396년(태조 5년) 9월 도성의 나머지 삼대문과 사소문이 준공될 때 함께 세워졌습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로11길 40에 있습니다. 일제시대에는 문루가 없었지만 1976년에 복원할 때 세웠습니다

원래는 지혜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의미의 숙청문이라고 하였으나 이후 중종 때에 '고요하고 안정되어 있다'는 정자로 바꾸어 숙정문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1523년(중종 18년) 처음으로 숙정문이라는 표기가 쓰인 후 혼용되다가 숙정문으로 굳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한양도성의 중앙종각 보신각

보신각

보싱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54에 위치한 제관 양식의 콘크리트 건축 누각. 한옥처럼 보여 목조건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으나, 엄연한 콘크리트 건축물입니다. 종이 달린 누각이라고 해서 흔히 종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서울 지하철 1호선 종각역과 매우 가까운데, 1974년 종로선(현 서울 지하철 1호선) 최초 개통 당시 종로1가 사거리에 만들어진 종각역의 명칭도 이 누각에서 따왔습니다.
특히 매년 12월 31일에 열리는 '제야의 종 소리'의 서울 지역 타종 행사로 잘 알려져 있는 곳입니다. 누각 자체는 여러 변천을 거쳤는데, 조선 광해군 때 중건돼 해방 때까지 보존되었던 옛 누각은 한국전쟁으로 폭격에 의해 사라졌다가 휴전 후 복구되었지만 현재의 누각은 1979년 구 보신각 터 바로 옆에 철근 콘크리트 구조의 2층 누각으로 재현해 놓았습니다.

옛 보신각 누각

한양도성의 남쪽소문 광희문

광희문 출처 서울신문

1396년 조선 태조 이성계의 지시로 세워지면서 '광희문'이란 이름이 처음으로 지어졌습니다. 1422년 세종 때 개축되었고 1719년 숙종 때 문루가 세워졌습니다.
일제강점기 1928년때 일부가 훼손되고 광희문 문루를 보수할 돈이 없다는 구실로 혜화문과 함께 철거해서 문루도 사라졌습니다. 1975년에 도로 확장을 명목으로 홍예까지 철거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홍예를 남쪽으로 15미터를 옮겨가 문루와 함께 다시 쌓은게 바로 현위치 광희문의 모습입니다. 지금도 광희문 자체는 원위치로 가지 못하였습니다.

시신의 운구가 이루어진 문이기 때문에 자주 곡소리가 들렸으며 일반 백성들도 지나가기 꺼리는 관문으로 알려졌습니다.

옛 광희문

한양도성의 동쪽소문 혜화문

혜화문 현재모습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307에 있는 조선의 한성 4소문 중 하나. 동소문입니다. 1938년 헐렸고, 1994년 복원공사를 통해 만들긴 했는데 원래 위치에 만들지 않았습니다.

본래 홍화문이라고 하였는데 나중에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과 발음이 같다 하여 혜화문으로 이름을 고쳤습니다.

대한제국 당시 혜화문


한양도성의 서쪽소문 소의문

소의문 터

조선 한성의 4소문 중 하나. 다른 이름으로는 서쪽에 있는 작은 문이라고 해서 서소문이라고도 하며, 과거에는 소덕문이라고 하였습니다. 1396년 건설되어 광희문과 함께 일반적인 통행로로 사용되었습니다.
1914년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가 소의문 지역에 도로와 경의선 철도를 낸다는 명분으로 소의문을 헐어버렸습니다.

대한제국 당시 소의문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한양도성의 북쪽소문 창의문

창의문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의문로 118에 있는 조선왕조 4소문에 속하는 관문. 일명 자하문이라고도 하며 서울의 4대 소문에 속한다고 하여서 북소문이라고도 합니다.
14대 왕 선조 때 임진왜란으로 문루가 소실되었고 15대 왕 광해군 말기 인조반정 때 반정군들이 통과하였던 관문으로 이를 통해 반정에 성공한 사례가 있습니다. 21대 왕 영조 때 들어서 왜란 때 소실되었던 문루가 복원되었으며 산 속에 있었던 영향 때문에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때 수난을 어렵게 면하였고 1958년 보수공사를 받은 것을 제외하고 온전하게 본래 모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오간수문

오간수문

오간수문은 원래는 한양도성 성곽의 일부로, 청계천이 도성을 빠져나가게 만든 수문이었습니다. 5개의 무지개 모양으로 된 홍예문이었으며 이름도 본래는 오간수문이었급니다. 사대문안의 물줄기는 청계천을 통해 이 문으로 빠져나갔습니다.

1396년(태조 5년)에 한양도성을 지을 때 창건한 듯 하나 정확한 건 모릅니다. 처음에는 수문이 3개였으나 1421년(세종 3년)에 장마로 개천이 범람하자 1년 뒤에 추가로 2개를 더 만들어 5개가 되었습니다.
1907년(융희 원년) 일제가 청계천 물줄기가 원활하게 흘러간다는 명분 하에 오간수문을 헐었고 1년 뒤에는 근처의 성벽마저 철거했습니다. 이후 그 자리에 콘크리트로 새 다리를 짓고 이름을 오간수교라 했습니다.

오간수교

이간수문

이간수문


한양도성 성곽의 일부로 남소문동천의 일부 지류가 도성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만든 수문이었습니다. 이를 제외한 나머지 도성 안의 모든 물줄기는 오간수문을 통해 흘러나갔습니다.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 281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내에 있습니다.
한양도성 중 가장 낮은 지대에 위치합니다.
1396년(태조 5년)에 한양도성을 지을 때 창건한 듯 하나 정확한 건 모릅니다. 이후 큰 변화 없이 조선시대 내내 존재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이간수문 일대에 경성운동장(광복 후 동대문운동장)을 세우면서 땅 속에 묻었습니다.
서울특별시에서 2008년 동대문운동장을 철거하고 DDP(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및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을 조성하던 중 그해 9월에 발굴되었습니다.



군사적으로도 한양도성은 처음부터 지키기 힘든 곳입니다. 규모가 너무 커서 방어하려면 병력이 많이 필요하고, 숭례문, 흥인지문 일대는 완전한 평지라서 지형상 불리합니다. 게다가 성 바깥에 잇는 안산, 인왕산, 남산, 북한산 등은 그 자체만으로도 한성 내부를 관측할 수 있는 감제고지가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성 자체의 방위력을 확보하려면, 막대한 예산과 인력을 동원해서 성벽을 요새화하고 대규모 상비군을 주둔시켜야 합니다. 하지만 이는 매우 비효율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선도 한양도성 자체의 방위력은 최소화하고 대신 남한산성, 북한산성과 같이 인근의 요새화한 산성을 방어 거점으로 사용하는 방위전략을 세운 것입니다.

한양도성과 도성의 성문과 종각에 대해서 다루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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