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건대 종묘의 위패는 나라의 대본이니, 종묘는 빛남이 있어야 하고, 증제와 상제는 나라의 대사이니 공명해야 한다. 이는 모두 선대부터 왕이 될 징조를 갖게 되어 나에게 이르러서 한 집이 나라로 변하니, 이번 성전을 보고서 내가 심히 스스로 경사로 여겼노라.
조선 태조실록 태조4년(1395년)
서울특별시 종로구 훈정동 1-2번지에 자리한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조선 왕실, 대한제국 황실의 유교 사당 입니다.
면적은 186,786 ㎡. 태묘라고도 합니다. '종묘사직'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 전제왕조 당시 왕실과 나라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물 중 하나였습니다.
1963년 1월 18일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1995년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정식 등재하였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종묘의 최초는 옛 중화권 국가인 상나라에서 처음 그 개념이 정립되기 시작하였고, 주나라 대에 이르러 예기에 실린 유교적인 형태의 종묘의 개념이 잡혔습니다.
종묘라는 단어가 한국사에서 처음 등장한것은 고구려였습니다.

외대문은 종묘의 정문으로 창엽문이라고도 하며 정면 세 칸의 평삼문으로 되어 있고 그 좌우로는 종묘 외곽을 두르는 담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원래 외대문은 전면 중앙에 난 돌계단으로 오르내리게 되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도로를 조성하면서 노면이 높아져 땅속에 묻히고 한동안 단벌의 장대석 기단만 있었습니다. 2009년 매몰된 외대문의 계단이 발굴되었습니다.

망묘루

외대문을 지나 오른쪽에 가장 처음 보이는 건물의 이름은 망묘루입니다. 망묘루란 '종묘를 바라보는 누마루 집'을 뜻합니다.
종묘제사 전날 임금은 아름다운 망묘루에서 선대왕을 추모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이 건물에는 임금들이 선대왕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표현한 시나 글이나 그림을 새긴 현판이 많이 걸려있었습니다.
향대청

향대청은 제향에서 올리는 향과 축문, 예물을 보관하는 장소였습니다.
하지만 종묘제사가 있을 때는 헌관들이 제사에 참여하기 전에 기다리는 장소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공민왕 신당

공민왕과 살아 생전 금슬이 좋았던 노국대장공주를 모신 신당으로 망묘루 동쪽에 있습니다. 하나의 종이에 두 위의 초상화를 같이 그려 놓았습니다. 태조 이성계가 처음 종묘를 세울 때 명령을 내려 같이 세웠다고 합니다. 신당 내부 왼쪽에는 공민왕이 그린 준마도 세 점도 같이 있습니다.

어정

우물은 조선의 역대 왕들이 종묘에 올 때마다 마셨다고 하여, 모실 어자를 써서 어정이라 불립니다.
여름에는 얼음처럼 차갑고, 겨울에는 따뜻해 인근 사람들은 더운 물이라고 불렸습니다.
우물의 지름은 1.5m이고, 깊이는 약 8m인데, 심한 가뭄에도 불구하고 항상 일정한 수위를 유지하였습니다.
어정은 아직 마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집사청

집사청은 종묘제례에서 업무를 맡았던 사람들이 대기하던 곳입니다.
어재실

종묘의 어재실은 왕이 종묘제사 전날 미리 도착하여 제사를 준비하던 곳입니다.
왕은 이곳에서 선조왕들을 생각하며 몸과 마음을 바로 잡았습니다.
제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모두 임금과 마찬가지로 제사 기간 동안 지켜야 할 엄격한 규칙이 있었습니다.
종묘 제사가 있기 7일 전부터 4일 전까지는 조문과 문병을 가지 않고, 음악도 듣지 않았으며, 죄인을 처벌하지도 않았습니다.
제사 3일 전부터는 오로지 종묘제사에 관련된 일만 할 수 있었답니다.
세자재실

세자재실에는 종묘제례 하루 전 왕과 함께 온 세자가 머물렀습니다.
왕과 마찬가지로 종묘제사 시기에 금지된 행위를 하지 않고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여 오직 조상신에 대한 제사에만 집중하였습니다.
어목욕청

어목욕청은 왕이나 세자가 제사 하루 전에 목욕하던 곳입니다.목욕을 통해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여 제사를 준비하였습니다.
수복방

정전을 관리하는 수복이 거처하던 건물입니다.
수복이란 조선시대 종묘서나 향실을 관장하던 교서관을 비롯해 단,능,궁 등에 소속되어 청소하는 일을 담당한 잡직을 일컫는 말입니다.
전사청

전사청 건물은 'ㅁ'자형 모양입니다. 종묘제사에 사용하는 음식을 준비하던 곳으로 제사에 필요한 여러 가지 기구들을 보관하기도 했습니다.
마당에는 제사음식을 장만할 때 사용했던 돌절구 4개와 제사 음식을 조리한 아궁이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정전 남문

정전으로 통하는 문은 누가 그 문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크기와 모양이 달랐습니다.
남문은 조상신이 출입하는 문으로 신문이라고도 하는데, 정전으로 통하는 문 중 제일 큽니다.
왕이 다니는 동문이 그 다음으로 크고, 악공과 신하들이 다니는 서문이 제일 작습니다.
정전

종묘의 중심건물로서 태조를 비롯하여 임금의 신주 19위, 왕후의 신주 30위 총 49위가 모셔져 있습니다. 정전의 남쪽 중앙에는 혼과 향로를 모시는 신문이, 동쪽에는 제례 때 제관이 출입하는 동문이, 서쪽에는 악공, 일무원, 종사원 등이 출입하는 서문이 있습니다.
정전의 전면에는 길게 다듬은 돌을 쌓아 만든 동서 109m, 남북 69m의 넓은 월대를 조성하였으며 그 가운데에는 정전의 신실로 통하는 신로가 남북으로 나 있어 사묘 건축으로서의 품위와 장중함을 나타냅니다.
정전 건물은 맞배지붕 형식이며 칸마다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은 매우 단순한 구조로 되어 있으며 단청도 최소화해 엄숙한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길이가 101 m에 달하는데, 우리나라에서 단일 목조건축으로는 가장 깁니다.
신주로 모시는 임금의 숫자가 늘어날 때마다 계속 방이 증축되어서이러한 길어졌는데, 건축물의 조성 방법 중에는 상당히 특이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정전의 기둥을 잘 보면 미묘하게 오래된 정도가 다릅니다. 서쪽이 오래된 것. 신위는 가운데에 태조를 모시고 좌우에 후대 임금을 소와 목으로 삼아 배치하는 소목 제도가 아니라 서상의 원칙에 따라 서쪽부터 태조 이하 후대 임금을 모셨습니다.
정전 동문

동문은 왕을 비롯한 종묘대제에 참여한 제관 및 왕실가족과 문무백관이 출입하는 문입니다.
정전 서문

서문은 종묘제례악을 연주하는 악공들이 출입하는 문입니다.
공신당

정전의 남쪽 신문으로 들어가면 동쪽에 자리한 정면 16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 시간이 흐르면서 정전이 증축된 것과 마찬가지로 공신당 또한 증축된 결과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습니다.
국가와 왕실에 공을 세운 신하들을 기리고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사당입니다. 임금의 생존시에 공로가 큰 신하들의 신위를 해당 임금의 묘정에 배향했는데, 제1대 태조의 공신 문충공 조준을 시작으로 제27대 순종의 공신 효문공 서정순까지 모두 제왕 19위에 공신 83위의 위패가 모셔졌습니다.
칠사당

정전의 남쪽 신문으로 들어가면 서쪽에 자리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일곱 소신의 위패를 모시고 사계절에 나라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던 사당입니다. 계절에 따라 봄에는 사명과 호, 여름에는 조, 가을에는 문과 여, 겨울에는 행과 중류를 모십니다. 이들 중 사명과 여를 제외한 다섯 신은 따로 오사라고 합니다.
정전 악공청

정전의 악공청은 종묘제례악을 연주하는 악공들이 제사 때 연주를 준비하며 대기하던 곳입니다
정전과 영녕전 사이의 숲 속에 위치합니다. 현재의 건물은 여러 차례 변형되어 원래의 모습을 잃은 상태입니다.
영녕전

정전에서 옮겨진 제왕과 왕후, 그리고 추존된 제왕과 왕후의 신주를 모시고 있는 별묘로 정면 16칸, 측면 4칸의 건물. 세종 3년(1421) 5묘제의 관습에 따라 정전에서 나와야 하는 선조들의 신주를 모시기 위해 건립되었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조금 덜 중요한 왕들"의 위패가 모셔진 곳. 제왕의 신주 16위, 왕후의 신주 18위 총 34위가 모셔져 있습니다.
영녕전의 부재 처리나 건물 규모는 정전보다 약간 작지만 전반적인 공간 구성은 정전과 비슷합니다.
영녕전 악공청

영녕전의 악공청도 정전 악공청과 마찬가지로 악공들이 사용하는 건물입니다. 건축 구조와 양식은 정전 악공청과 같습니다.
제정

제사 음식에 필요한 물을 공급하던 우물입니다.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우물 주변으로 담장을 둘렀습니다.
요대

요대는 제사 의식인 제향이 끝나고 조상에 올린 축문과 폐백을 태우는 곳입니다. 정전과 영녕전 모두 건물 서쪽 뒷면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조선왕실의 신성한 장소이자 왕실과 국가를 상징하고 선대를 모신 종묘를 다루어 보았습니다. 문화재의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1995년 등재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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