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통해 미래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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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대까지 큰 복을 누리리라 경복궁(下) 새 궁궐을 경복궁이라고 이름짓기를 청하오니, 전하와 자손께서 만년 태평의 업을 누리시옵고, 사방의 신민으로 하여금 길이 보고 느끼게 하옵니다. 조선 태조실록 태조4년(1395년) 경복궁은 임진왜란 후로 273년간 재건하지 못하다가 1865년 4월 26일(고종 2년 음력 4월 2일) 고종의 수렴청정을 하던 신정왕후의 지시로 중건이 시작되어 같은 해 5월 7일(음력 4월 13일) 공역이 시작되어 1868년 6월 말에 공사를 마쳤으며, 7월 2일 국왕과 왕실의 경복궁 이어가 이루어져 정무를 개시하였습니다. 경복궁의 재건을 주도한 흥선 대원군은 권력을 장악하였습니다. 공사를 마치기까지 당백전을 발행하는 등 7년이 넘게 걸렸는데, 경복궁에는 다른 궁궐과 마찬가지로 승정원, 홍문관 등 기타 여러 관아가 정비되어 있.. 더보기
만대까지 큰 복을 누리리라 경복궁(中) 경복궁은 조선이 건국된 지 3년여가 지난 1394년 12월에 착공되어 1395년 9월 말에 1차 완공되었습니다. 흔히 비교되는 명나라의 자금성보다 먼저 지어진 궁전입니다. 자금성은 1406년에 착공되어 1420년에 완공되었습니다. 즉, 경복궁이 자금성을 본따 지었다는 등의 설명은 틀린 설명입니다. 완공 후 정도전이 궁궐의 주요 전각인 강녕전, 연생전, 경성전, 사정전, 근정전, 근정문 등의 이름을 정했습니다. 처음 완공 당시 경복궁의 규모는 390여 칸이었습니다. 경복궁은 세종대를 거치면서 제대로 궁궐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조선 전기 경복궁의 기본적인 형태는 세종 때 완성되었습니다. 이후 경복궁은 조선 전기 내내 조선의 정궁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세종대 이후에도 경복궁은 여러 왕을 .. 더보기
만대까지 큰 복을 누리리라 경복궁(上) 경복궁 이라는 이름은 정도전이 지었습니다. 태조 이성계가 궁궐의 이름을 지어 왕조가 만대까지 빛나도록 하라는 명을 받자 즉석에서 지었다고 합니다. 경복궁은 조선왕조의 법궁입니다 . 법궁이란 궁궐중 으뜸인 궁궐을 의미하는것입니다. 경복궁을 제외한 나머지 궁궐들은 이궁이라 불렀습니다. 경복궁은 법궁답게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고 한양으로 천도를 하면서 가장 먼저 지어진 궁궐입니다. 현재의 모습은 임진왜란으로 불에탄 후 200여년간 방치되다 흥선대원군이 재건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것입니다. 임진왜란 전의 경복궁과는 차이가 있는 모습이라고 합니다. 조선 초기의 경복궁은 최대 5000칸까지 서서히 확장 되었고 조선 후기 재건된 경복궁은 애초에 7400칸이 였습니다. 조선초기 경복궁은 근정전에 청기와를 얹었다거나 세.. 더보기
조선의 마지막 신도시 정조의 꿈 수원화성 호위를 엄하게 하려는 것도 아니요, 변란을 막기 위한 것도 아니다. 여기에는 나의 깊은 뜻이 있다. 장차 내 뜻이 성취되는 날이 올 것이다. 조선 정조 정조실록 15년(1791) 수원화성은 조선시대 정조때의 지은 수원시의 성곽 건축물 입니다.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도 등록되었으며, 치밀한 사전 계획 하에 만들어진 계획도시이자 조선의 마지막 신도시 입니다. 원래 유네스코에 등재되는 건축물은 원본 그대로인 건축물이어야 하는데 수원화성은 70년대에 대대적인 복원을 거쳐 이러한 규칙에 맞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수원화성을 계획하면서 그림과 글로 설계도와 내용을 철저하게 남겨놓은 화성성역의궤 덕분에 원형에 가깝게 복원할 수 있었다는 점을 인정받아 이례적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 더보기
민주주의에 꽃인 투표를 1430년에 실시한 세종대왕 어리석은 백성이 이르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끝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위해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하여금 쉬이 익혀 날마다 씀에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다. (훈민정음 서문의 일부) 조선시대에도 국민투표가 있었습니다. 세종은 토지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는 새로운 세법인 공법을 추진하면서 최종적으로 백성들의 찬반 의견을 묻고자 했습니다. 투표 3년 전인 1427년 세종은 창덕궁 인정전에 나가 과거시험 문제를 내면서 공법에 대한 견해를 묻는 등 세법을 확정하기 전에 미리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1430년 3월부터 5개월간에 걸쳐 역사상 최초의 국민투표가 실시됐습니다. 세종은 "백성이 좋지 않다면 이를 행할 수 없다"고 천명했고, 백성 1.. 더보기
100만명의 목숨을 빼앗은 조선 최악의 기근 경신대기근 조선 현종 11년과 12년(1670 ~ 1671)에 걸친 대기근입니다 1670년 갑작스러운 흉작과 병충해로 인한 곡물 생산량의 급격한 감소, 강력한 태풍의 접근, 치사율이 높은 전염병의 유행 등으로 수도 한양을 비롯한 국토 전체에서 대량의 아사자와 병사자가 발생, 이듬해까지 지속되면서 행정이 마비될 정도의 국가적 위기가 도래한 사건입니다. 불길한 징조는 새해 벽두부터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1670년 음력 1월 1일 새해 벽두부터 속은 붉고 겉은 푸른 햇무리가 관측되었고, 4일에는 달무리가 관측되더니, 1달 내내 햇무리와 달무리가 매일같이 관측되었습니다. 보통은 다음날 비가 내리거나 큰 먼지가 있다는 징조로 해석되는데, 이것이 매일 관측되었다는 것은 심상치 않은 일입니다. 예로부터 하늘에 뭔가 다른 것이 .. 더보기
조선의 신전 종묘 생각하건대 종묘의 위패는 나라의 대본이니, 종묘는 빛남이 있어야 하고, 증제와 상제는 나라의 대사이니 공명해야 한다. 이는 모두 선대부터 왕이 될 징조를 갖게 되어 나에게 이르러서 한 집이 나라로 변하니, 이번 성전을 보고서 내가 심히 스스로 경사로 여겼노라. 조선 태조실록 태조4년(1395년) 서울특별시 종로구 훈정동 1-2번지에 자리한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조선 왕실, 대한제국 황실의 유교 사당 입니다. 면적은 186,786 ㎡. 태묘라고도 합니다. '종묘사직'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 전제왕조 당시 왕실과 나라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물 중 하나였습니다. 1963년 1월 18일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1995년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정식 등재하였습니다. 우리가 .. 더보기
조선 왕실의 위엄과 권위 한양도성 서울 한양도성은 조선 시대 한양을 둘러싼 도성입니다. 좁은 의미로는 서울을 둘러싼 성곽과 문을 지칭하나, 넓은 의미로는 성곽과 그 안의 공간을 말합니다. 조선 시대에는 줄여서 한성으로 불렸으며, 사적으로서의 명칭은 지정 당시 서울성곽으로 정했다가 2011년 현재의 명칭으로 바뀌었습니다. 4대문의 경우 숙정문은 산 속에 위치한 덕분에,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가 입성한 곳이라는 타이틀 덕분에 일제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돈의문은 헐려버렸고 그 자리에 도로와 건물이 들어서버려 현재로서는 복원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또한 안타깝게도 남대문은 2008년 숭례문 방화 사건으로 인해 옛날 그대로의 모습을 잃고 처음부터 다시 복원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벽의 높이는..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