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지막 신도시 정조의 꿈 수원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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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마지막 신도시 정조의 꿈 수원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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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를 엄하게 하려는 것도 아니요, 변란을 막기 위한 것도 아니다. 여기에는 나의 깊은 뜻이 있다. 장차 내 뜻이 성취되는 날이 올 것이다.
조선 정조 정조실록 15년(1791)


수원화성은 조선시대 정조때의 지은 수원시의 성곽 건축물 입니다.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도 등록되었으며, 치밀한 사전 계획 하에 만들어진 계획도시이자 조선의 마지막 신도시 입니다.
원래 유네스코에 등재되는 건축물은 원본 그대로인 건축물이어야 하는데 수원화성은 70년대에 대대적인 복원을 거쳐 이러한 규칙에 맞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수원화성을 계획하면서 그림과 글로 설계도와 내용을 철저하게 남겨놓은 화성성역의궤 덕분에 원형에 가깝게 복원할 수 있었다는 점을 인정받아 이례적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습니다.

정조가 화성을 세운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이상적인 도시를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꿈꾸는 도시를 만들기 위해 대신들과 의논하며 철저하게 서로 계획하고 실천하였으며, 정교한 석축술을 보여준 것이 이 화성입니다.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하기 위해 지었으며, 정약용에게 궁중 비서인 '기기도설'을 하사하여 거중기를 제작하게 하여 정약용이 거중기를 사용하여 만들었습니다.

거중기

이때 사용된 거중기에 대해서는, 사용된 거중기가 총 11대여서 작업 능률이 4~5배로 높아졌다는 설과, 거중기가 단 한 대밖에 없었고 대신 당시 조선의 모든 기술을 종합한 도구들을 이용하여 축성 기간과 비용을 상당히 아꼈다는 설 두 가지가 존재합니다.
수원화성의 건축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수원화성의 정문이자 북문 장안문입니다

장안문 출처 수원문화재단

수원화성의 북문이자 정문입니다. 그래서 이곳을 칭할 때에 북문이라고도 합니다. 한국전쟁 이후까지 남아있었다면 국보로 지정되었을 문화재입니다. 조선의 22대 임금인 정조 18년(1794년)에 정조의 부친되는 사도세자의 원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이장할 때 다른 수원 화성 성곽과 함께 건립되었습니다. 이름은 중국의 옛 왕조인 전한, 수, 당나라의 수도였던 장안(현재의 시안시)에서 따온 것입니다.

높이 3.8 m, 너비 3.6 m, 두께 7.9 m에 달하는 홍예 위에 2층으로 된 누각이 설치된 전형적인 성문 구조로서, 문루의 높이는 상하를 합하여 13.5 m이고, 좌우의 너비가 18 m(10칸)에 옆너비가 9 m(5칸)입니다.

장안문의 크기는 숭례문보다 큽니다.

조잡하지만 간단한 정리 위치적인 이유로 북문이 정문이 되었습니다

대체로 남향을 선호하여 대부분이 정문을 남쪽으로 만들어 남문인 팔달문을 정문으로 생각하거나 그렇게 다루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수원 화성에서는 왕이 북문으로 행차하기 때문에 북문을 정문으로 합니다.

화성성역의궤의 장안문

동문 창룡문

창룡문

창룡문은 화성의 동쪽 출입문이다. 창룡은 푸른 용을 뜻하며 동쪽 방향을 지켜주는 신령한 동물을 상징합니다.
화성의 4대문 중 하나인 창룡문은 1795년에 세워졌으며, 석조 홍예문, 단층 목조 누각, 벽돌 옹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문의 건축에 참여하였던 사람들의 이름이 벽에 새겨져 있습니다.
문에서 이어지는 길은 서울 동쪽 지역과 연결되었지만, 자주 쓰이는 길은 아니었습니다. 창룡문 가까이에 주변을 멀리 감시할 수 있도록 동북공심돈을 높이 세웠으며, 창룡문 북쪽의 평탄한 지역은 군사 훈련장으로 활용되었습니다.
창룡문의 목조 누각은 한국전쟁 중에 파괴되었다가 1976년에 복원되었습니다.

출처 수원문화재단


서문 화서문

화서문

화서문은 수원 화성의 서문이다. 1964년 9월 3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40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좌우 성벽에 연결되는 돌로 된 기부에 홍예문을 두어 그 위에 단층의 문루를 세웠습니다. 문의 앞부분에는 반달형으로 된 전축 옹성이 있는데 높이는 안쪽이 2.62m, 바깥쪽이 3.65m, 두께는 3.25m입니다. 이 옹성은 한 평이 트여 있어 문을 출입할 때 통과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1975년 수원 화성을 중수 공사할 때 보수되었습니다.

남문 팔달문

팔달문

팔달문은 수원 화성의 남문입니다. 1964년 9월 3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40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문루의 규모는 높이 9m, 너비 25m로, 누상에 종이 걸려 있습니다. 수원 화성은 정조 18년(1794년)에 이궁으로 축성되었습니다. 중국을 거쳐 들어오는 서양문화의 영향을 반영한 점이 중요한데, 이는 전축의 보루 같은 구조 면에서나 건축기계 면에서 실측할 수 있습니다. 흥인문에서와 같은 옹성을 앞쪽에 두고 역시 위에는 총안을 뚫었습니다.
팔달문은 모든 곳을 통한다는 사통팔달의 의미이며 축성 당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화홍문(북수문),남수문

화홍문 출처 문화유산채널

화홍문은 성의 북수문입니다. 화홍문은 화성의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홍수를 대비하여 수원천 북쪽에 세워진 수문입니다.
1794년 (정조 18년) 2월 28일 공사에 착수하여 8월 3일에 상량이 이루어지고, 이듬해 1795년(정조 19년) 1월 13일 문루가 준공되었습니다. 북수문에는 물이 흐를 수 있도록 7개의 홍예문이 있고, 남수문과 달리 북수문 위에는 누각이 있습니다. 누각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누마루 형식으로 하고 초익공(初翼工)의 겹처마이며, 지붕은 5량 팔작지붕의 형태입니다. 누각을 설치해서 홍예에서 쏟아지는 장쾌한 물보라와 주변 환경이랑 잘 어우러져서 수원8경의 하나로 화홍관창이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운 경관을 조성해 놓았습니다.

화홍문

남수문

남수문 출처 수원문화재단

남수문은 북수문과 마찬가지로 교량과 수문의 역할, 비상시에는 군사시설로 활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1794년(정조 18년) 2월 28일 공사에 착수했다가, 이듬해 11월까지 공사를 중단되었다가 다시 공사를 재개하여, 1796년(정조 20년) 1월 16일에 홍예가 이루어졌습니다.
남수문은 화홍문과 마주서서 물줄기의 흐름을 인도하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석축으로 9칸의 홍예를 틀고 철전을 설치하여 잠가두는 것이 화홍문의 제도와 같았습니다. 남수문은 9개의 홍예문 위에는 통로를 만들고 여장을 높이 쌓았는데, 돌기둥 8개가 돌다리를 떠받들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장포라는 전돌로 만든 긴 포를 설치했는데 길이는 수문의 다리와 같고 폭은 다리의 3분의 2로 해서, 이 안에 수백 명이 들어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또 이곳에는 많은 포혈을 설치하여 군사시설로서도 활용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수원시는 수원 화성이 1997년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뒤
남수문 복원을 위해 지난 2004년 남수문터에 대한 발굴조사에 나섰고, 2010년 9월부터 복원공사에 들어갔습니다. 2010년 6월 공사를 시작한 남수문 복원사업은 길이 29.4m, 너비 5.9m, 전체 높이 9.3m로, 수문 아래쪽은 9칸 홍예수문(무지개다리)을 연결한 형태이고 수문 위쪽은 전등을 이용해 원형 복원됐습니다.

서장대,서노대

서장대 출처 문화유산 채널

서장대는 화성의 군사지휘본부로서 화성장대라고도 불립니다. 팔달산의 정상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1794년(정조 18년) 8월 11일 공사에 착수, 9월 16일에 상량하고, 9월 29일에 완공됐습니다. 화성장대라는 편액은 정조가 직접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서장대에서는 성 전체가 한눈에 들어와, 화성 일대는 물론 이 산을 둘러싸고 있는 100리 안쪽의 모든 동정을 파악하고, 그 자리에서 군사들을 지휘할 수 있는 위치입니다. 이 곳에는 장대석으로 대를 쌓고 세 벌의 계단을 마련하고 그 위에다 또 한 단의 대를 놓고, 또 그 위에다 2층지붕의 건물을 세웠습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중층 누각으로서 상층은 정면과 측면이 각각 1칸의 모임지붕으로 되어 있습니다.

서노대

서장대 바로 뒤에 서노대가 서있습니다. 서노대는 서장대의 서북쪽에 동향하여 성 한가운데서 다연발 활인 쇠뇌를 쏘기 위하여 높이 지은 곳으로 정팔각형꼴로 전벽돌을 쌓아놓았고 계단 부분은 트이게 하였습니다.


서북,동북공심돈

서북공심돈
동북공심돈

수원 화성을 구성하는 성채의 일부. 공심돈은 적의 동향을 살핌과 동시에 공격도 가능한 시설로 수원 화성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서북공심돈은 2011년 보물 제171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1796년(정조 20) 3월 10일 완공된 서북공심돈은 3층 건물로 아래쪽 부분의 치성은 석재로, 위쪽 부분의 벽체는 전돌로 쌓았습니다. 내부는 전투에 편리한 구조를 갖추었으며 계단을 통해 오르내렸습니다.

1797년(정조 21) 1월 화성을 방문한 정조는 서북공심돈을 보고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만든 것이니 마음껏 구경하라”며 매우 만족스러워했다고 합니다.
동북공심돈은 1796년(정조 20) 7월 19일 완성되었습니다.
형태는 커다란 둥근 원의 모습으로 화성 성곽내에서 가장 특징이 있는 건물의 하나입니다. 동북공심돈 내부는 소라처럼 생긴 나선형의 벽돌 계단을 통해서 꼭대기에 오르게 되어 있어 일명 ‘소라각’이라고도 불립니다.

북,북서,북동,동일,동,동이,남포루

북포루 출처 수원문화재단

수원화성에 설치한 화포를 갖춘 시설입니다. 화성에는 모두 5곳의 포루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 이후 포루가 등장했는데 정약용은 중국의 제도를 두루 살펴 발전된 형태의 포루를 설계했습니다. 포루는 벽돌로 만든 3층 구조로, 아래 두 층은 화포나 총을 쏠 수 있도록 만들었고 상층은 군사들은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누각을 만들었다. 『화성성역의궤』에 포루의 구조가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포루 외,내,이도

동북각루(방화수류정),서북각루,동남각루,서남각루(화양루)

동북각루(방화수류정) 우측에 화홍문이 보입니다

화성 서북쪽 요충지에 세운 감시용 시설입니다. 화성에는 모두 4곳의 각루가 있습니다. 서북각루는 화서문에서 팔달산 기슭으로 오르는 지형에서 성벽이 돌출되며 휘어진 곳에 있습니다. 이곳은 북쪽과 서쪽의 성 밖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적을 감시하기 용이합니다. 서북각루는 동남각루와 같은 구조입니다. 아래층은 군사들이 머무는 방에 온돌을 놓았고, 위층은 마룻바닥으로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사면에 널빤지 문을 달고 활 쏘는 구멍을 냈습니다.

동북각루는 1794년(정조 18) 10월 19일 완공되었습니다. 주변을 감시하고 군사를 지휘하는 지휘소와 주변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정자의 기능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2011년 보물 제170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북서,북동적대

북서적대

장안문 서쪽에서 성문에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방어시설입니다. 화성에서는 장안문과 팔달문 좌우에 적대를 설치했는데 현재 장안문에만 남아있습니다. 장안문 좌우 적대에는 현안을 세 줄 설치한 반면 팔달문 적대에는 두 줄을 설치했다. 장안문을 더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적대는 우리나라 성곽 중 유일하게 화성에만 있습니다.

동장대,동북노대

동장대

동장대는 성의 동쪽 동북공심돈과 동암문 사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1795년(정조 19년) 7월 15일에 공사 착수, 8월 10일에 상량, 8월 25일에 장대 건물을 완공하였습니다.
이 장대의 지형은 높은 곳은 아니지만 사방이 트여 있고, 등성이가 험하게 높이 솟아 있는 곳으로 동쪽 구릉인 선암산의 요지이자 성중에서 지휘소를 설치하기에 딱 좋은 장소입니다. 3단으로 쌓은 대가 있고, 3층의 대에서는 총수가 숨어서 쏘기에 편리하게 시설되어 있습니다. 한가운데 좌우에 와장대를 설치하고, 흙을 판판하게 해서 돌로 깔아 하대에서 말을 타면서도 장대에 올라 갈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장대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9칸의 익공식 단층의 팔작기와지붕입니다. 건물 주변에는 터를 동서로 80보, 남북으로 240보로 넓이를 잡아 조련장, 일종의 훈련장 같은 것을 닦아 놓았습니다.

동북노대

동북노대는 창룡문과 동북공심돈의 중간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정조 20년 4월 14일에 완공되었습니다.

동,북,서,서남,남암문

서암문
북암문
서남암문
동암문

암문은 성 깊숙한 곳에 적이 찾지 못하도록 설치를 해서 사람이나 가축이 통과하고 군수품을 조달하기 위한 일종의 비밀의 문입니다. 화성에는 동암문, 북암문, 서암문, 남암문, 서남암문 등의 5개의 암문이 있습니다. 하지만 남암문은 그 지역이 시가지화되면서 인멸되고 지금은 미복원 상태입니다.

북암문은
동암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곳에 있으며, 방화수류정과 거의 함께 있습니다. 그 근처는 약간 골짜기진 곳이라서 밖에서 찾기가 어렵다. 안쪽은 너비가 4척 6촌 높이가 6척 5촌이고, 바깥쪽은 너비가 4척 높이가 6척입니다. 1795년(정조 19년) 2월 23일 에 홍예가 이루어졌습니다.
서남암문은
보통 다른 암문과는 달리 서남각루로 나가는 암문으로서 유일하게 암문 위에 포사 1칸이 세워져 있습니다. 1796년(정조 20년) 8월 6일에 암문의 홍예가 이루어졌습니다. 포사는 한 칸 사방의 규모로, 온돌을 놓고 사면에 판문을 대고 바깥쪽 문에다 짐승의 얼굴을 그려 넣었습니다.
서암문은
팔달산 서장대 근처에 있는 암문으로, 입구가 꺾여 있어서 찾기 힘듭니다. 안쪽의 너비는 5척 6촌, 높이는 7척 7촌이고, 바깥쪽은 너비 4척 1촌, 높이는 7척 2촌입니다. 정조 20년 6월 18일에 홍예가 이루어졌습니다. 문의 안의 높이는 높고 밖은 낮아 안에 계단을 설치해서 계단으로 내려가서 성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서암문은 북암문이나 동암문과 같이 성곽을 깊게 하여 암문을 설치하면 지형상 쉽게 발견될 수 있으므로 암문이 옆으로 틀어 앉혀져 있어서 암문을 쉽게 발견되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동암문

봉돈

봉돈

봉돈은 불을 비추어 행궁을 수비하고 성을 수비하며 주위를 정찰하여 사태를 알리는 군사 및 교통상의 신호 시설물입니다. 봉돈은 화성 동문의 서남쪽에 있으며, 5개의 연기구멍을 갖추어 신호를 보낼 수 있도록 되었습니다. 1796년 (정조 20년) 6월 17일에 완공되었습니다.
성벽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키고 하층은 석축으로 쌓고, 위는 전축으로 성벽보다 높이 쌓아 위쪽에 여장을 두었습니다. 내부는 3층의 계단식으로 만들어서 가장 높은 곳에 5개의 횃불 구멍인 화두를 설치하였습니다. 여장 3면에는 포혈 18개를, 그 아래 3면 벽성에는 총안 18개와 누혈 1개를 뚫었습니다.
밤에는 불, 낮에는 연기로 신호를 보냈습니다. 평상시에는 남쪽의 첫째 것에만 사용을 했습니다. 나머지 4개는 긴급한 일이 없으면 횃불을 들거나 연기나게 하지 않았습니다. 적이 나타나면 2개, 경계에 접근하면 3개, 경계를 침범하면 4개, 그리고 적과 접전시에는 5개의 봉화를 올렸습니다.

남치 용도일,이치 서일치 서이치 서삼치 동일치 동이치 동삼치

동이치

치는 철(凸)자 모양으로 성벽 밖으로 돌출시켜, 좌우 방향에서 접근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한 방어 시설물 중 하나입니다. 치라는 이름은 '꿩'이란 뜻으로 본래 꿩은 제몸을 숨기고 밖을 엿보기를 잘한다는 까닭에서 그 이름을 땄습니다.

북동치


수원의 상징이자 자랑 정조의 꿈이자 이상 도시 수원화성을 자세히 다루어 보았습니다. 정조대의 건축기술이 얼마나 발전 하였는지를 엿볼수 있는 유산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정조의 이상이 제대로 실현되고 유지되지 못한것이 굉장히 아쉽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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