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은 조선이 건국된 지 3년여가 지난 1394년 12월에 착공되어 1395년 9월 말에 1차 완공되었습니다.
흔히 비교되는 명나라의 자금성보다 먼저 지어진 궁전입니다.
자금성은 1406년에 착공되어 1420년에 완공되었습니다. 즉, 경복궁이 자금성을 본따 지었다는 등의 설명은 틀린 설명입니다.
완공 후 정도전이 궁궐의 주요 전각인 강녕전, 연생전, 경성전, 사정전, 근정전, 근정문 등의 이름을 정했습니다. 처음 완공 당시 경복궁의 규모는 390여 칸이었습니다.
경복궁은 세종대를 거치면서 제대로 궁궐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조선 전기 경복궁의 기본적인 형태는 세종 때 완성되었습니다.
이후 경복궁은 조선 전기 내내 조선의 정궁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세종대 이후에도 경복궁은 여러 왕을 거치면서 지속적인 증·개축을 거쳤습니다. 근정전과 광화문에는 청기와가 올라가기도 했습니다.
내조
(침전권역)
강녕전,연생전,경성전,연길당,응지당

경복궁의 건물로, 임금의 정식 침전입니다. 왕도 사람이니만큼 자신만의 생활공간이 당연히 필요했습니다. 이 곳이 바로 그 기능을 담당하는 곳이었습니다. 간단히 왕의 집 입니다.
이름은
조선 초 재상이던 삼봉 정도전이 지었습니다.
강녕은 말 그대로 ‘편안함’을 뜻합니다.
정면 11칸, 측면 5칸의 1층으로 조선 왕궁의 정식 침전 중 가장 규모가 큽니다. 평상시엔 왕의 침전으로 쓰였지만 이따금씩 주요한 행사가 열리기도 하였습니다.
원래 각 건물과 강녕전 본전을 연결하는 복도각이 존재했었는데 그 흔적이 측면 양쪽 가장자리 퇴간 부분에 창문이 아닌 문이 달려있는 것입니다. 처음엔 창호문과 기와를 갖춘 일반적인 건물 형태로 있었는데 1873년(고종 10년) 경복궁에서 일어난 화재로 고종이 복도각의 모습을 비만 피할 수 있게끔 바꾸라고 지시하면서 지붕도 철 지붕으로 바뀌고 벽체도 사라졌습니다.


강녕전 동, 서에 위치한 보조 침전입니다. 역사는 강녕전과 완전히 같습니다. 위에 언급했듯 강녕전과 복도로 통했기 때문에 서쪽에 위치한 경성전은 동북쪽 가장자리 면에, 동쪽에 위치한 연생전은 서북쪽 가장자리 면에 창이 아닌 문이 달려있습니다.
정면 7칸, 측면 4칸이며 남쪽과 북쪽에 각각 가퇴가 있었으나 당시 자료의 부족으로 복원할 때 못지었습니다. 정면 가장자리와 대청 북쪽의 툇간을 제외한 나머지 가장자리 칸은 전부 방이다. 북쪽으로 방이 7칸 남쪽으로 5칸이 있고, 그 중 한 칸은 북쪽 방과 남쪽 방 사이에 있습니다다. 대청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총 4칸입니다.
두 건물은 서로 짝을 이루며 형태가 대칭입니다.


강녕전의 부속 건물입니다. 조선 전기에는 없었고 고종 때 경복궁 중건하면서 새로 지었으며 이후의 역사는 강녕전과 같습니다. 당초엔 단순히 경성전, 연생전보다 약간 격이 낮은 보조 침전이나 접견소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2019년 6월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소장중인 《경복궁중건일기》가 번역, 공개되면서 왕의 식사를 데워 수라상에 올려 들이던 중간 부엌임이 드러났습니다.
정면 4칸, 측면 3칸, 총 12칸으로 정면에서 볼 때 동쪽 2칸은 대청으로, 서쪽 2칸은 온돌방입니다. 앞면에는 퇴간을 두었고 그 중 서쪽의 한 칸을 제외한 나머지 3칸은 툇마루가 건물 밖으로 나오게 하였는데 출입은 동쪽 2칸의 대청으로만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단, 두 건물의 차이가 있는데 강녕전과 복도로 이어지는 문의 위치가 다릅니다. 응지당은 동남쪽 측면에, 연길당은 서남쪽 측면에 있다. 이외의 구조는 전부 같습니다.
교태전,원길헌,함홍각,건순각,함원전,아미산

경복궁의 건물로 왕비의 정식 침전, 즉 중궁전입니다.
임금의 침전인 강녕전의 북쪽에 있습니다. 광화문부터 시작된 경복궁 중심축의 제일 끝을 장식하는 건물입니다.
이름의 뜻은
왕(남자, 양)과 왕비(여자, 음)가 서로 잘 지내어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뜻입니다.

원길헌은 동쪽에 위치한 부속 전각으로, 이름 뜻은 주역의 태괘와 곤괘에서 유래했으며 ‘크게 선하여 길하다’는 뜻입니다. 조선 초기엔 없었고 1867년(고종 4년) 경복궁 중건 당시 처음 지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의 역사는 교태전과 같습니다.
출입문 쪽 벽면은 전면창호가 아니라 문선과 중방 사이에 창문을 내었습니다. 온돌방이 큰 방 3칸, 쪽방 3칸의 6칸, 마루가 대청 2칸, 쪽마루 2칸의 4칸, 다 합쳐 총 10칸 규모로 되어있는데, 동쪽 대청에서 남쪽으로 연결되는 동쪽 행각의 일부를 포함하여 그 부분까지 합쳐 실제로는 온돌방 4칸을 더 활용할 수 있습니다. 건물 앞쪽에 쪽마루를 설치해서 교태전 건물 안에서는 물론 건물 밖에서도 신발을 벗고 이동하기 편하게 만들었습다. 기단의 높이가 교태전보다 한 단 낮아 건물 서열이 교태전보다 아래임을 확실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1890년대 고종이 건청궁에 머물던 시기엔 다양한 용도로 쓰였습니다. <일성록>엔 약원들이 여기서 진료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고종이 외국 공사를 접견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일제강점기이던 1917년 창덕궁 내전 재건 때 철거, 이전되어 원래의 원길헌은 흥복헌 이 되어있습니다. 지금의 건물은 1995년 복원된 것입니다.

함홍각은 교태전 서쪽에 위치한 부속 전각입니다. 이름은 곤괘에 나오는 함홍광대에서 유래했으며 포용하고 너그럽다는 뜻입니다.
역사와 건물의 구조는 원길헌과 동일합니다. 단, 원길헌과 달리 북쪽에도 행각을 두었으며 남쪽 행각과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건순각은 교태전 동북쪽에 위치한 부속 전각입니다. 이름은 에 나온 건괘는 굳건하고 곤괘는 순하다는 의미의 건건곤순에서 유래했습니다. 역사는 원길헌, 함홍각과 같습니다.
평면이 ‘ㄱ’자로 되어있으며 교태전과 이어지는 쪽은 누각형 마루로 되어있어 아랫쪽에 기단이 없고 돌기둥으로 받쳐져있는데 그렇게 길지 않은 높이입니다. 그 옆으로 온돌방을 2칸 놓았으며 그 북쪽에 마루 2칸을, 그리고 마루방 옆에 온돌방을 2칸 놓았습니다. 건물 앞쪽에 쪽마루를 설치해서 교태전 건물 안에서는 물론 건물 밖에서도 신발을 벗고 이동하기 편하게 만들었습니다.

경복궁 교태전의 부속 건물입니다. 이름은 원기를 간직한다는 뜻입니다.
창건 연대는 정확히 모르나 세종이 궁궐 내 불당을 설치해 불교 행사를 행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세종 연간에 처음 지은 것으로 보입니다.
일제강점기 이후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때엔 귀빈관으로 쓰이다가 1917년 불타 없어진 창덕궁 내전을 재건할 때 조선총독부가 경복궁 내전 건물을 자재로 쓰면서 해체, 이전되었습니다. 이후 80년 가까이 빈 터로 남아있다가 문화재관리국에서 경복궁 종합 정비 계획 사업의 일환으로 1995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릅니다.

경복궁 교태전 후원에 있는 인공 언덕입니다.
이름은 중국 불교와 도교의 성지 중 하나인 아미산에서 따왔습니다. 그 산이 산둥성 박산현에 있는 산인지 쓰촨성 아미현의 산인지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태종 시절 경회루의 연못을 팔 때 나온 흙을 쌓아 만들었습니다. 백두대간과 한북정맥의 흐름을 경복궁까지 이어 백두산의 기를 받으라는 상징적인 뜻이 담겨있습니다. 다만, 일반적으로 이 기를 받을 사람을 왕비가 교태전에서 낳는 왕세자와 대군, 공주들로 여기는 경우가 많지만, 아미산이 처음 조성될 때는 교태전이 없었기 때문에 왕이 기운을 받으라는 의미로 추측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미산하면 4개의 굴뚝이 제일 유명합니다. 교태전의 온돌방에서 나오는 연기를 내보내기 위해 만든 굴뚝입니다.
육각형입니다. 화강암 받침돌 위에 황토색 벽돌로 30단 정도를 쌓아 몸체를 만들었습니다. 몸체의 윗 부분은 소로와 창방 · 첨차 형태로 만든 벽돌을 쌓고 기와지붕을 이었습니다. 맨 위에는 연기가 빠져나가는 연가를 점토로 만들어 두었습니다.
교태전 일곽의 건물들은 전부 1995년에 복원한 것이지만, 이 굴뚝은 1860년대 고종 시절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거기에다 미적 가치 등이 뛰어났기에 1985년 1월 8일 보물 제81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소주방

경복궁의 주방입니다.
궁궐도 사람 사는 곳이니만큼, 그들이 먹을 음식을 만들어 준비하는 주방도 당연히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각 궁 마다 주방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경복궁과 창덕궁에만 존재하고, 그나마도 창덕궁 주방은 서양식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전통적인 궁궐 주방은 경복궁 주방 뿐입니다.
주방은 한 곳이 아니라 여러 곳에 있었숩니다. 각 처소의 주인이 먹을 음식을 따로 만들었고, 왕실 내 행사에 따라 준비해야할 음식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대전 강녕전, 중궁전 교태전의 동쪽, 동궁 자선당의 북쪽, 대왕대비전 자경전의 남쪽에 있습니다. 궁중에서 제일 중요한 인물들의 처소 사이에 자리한 것입니다.
자경전,청연루,꽃담,십장생 굴뚝

조선시대 궁궐 경복궁의 대비전 중 하나입니다. 고종의 양어머니 신정왕후 조씨가 머물던 곳입니다.
위치는 교태전의 동북쪽이며 남향을 하고 있습니다.
이름은 정조가 혜경궁 홍씨를 위해 지었던 창경궁 자경전에서 따왔다. '자경' 이란 말 자체는 ‘자친, 그러니까 (왕의) 어머니가 복을 누린다’는 의미입니다.
경복궁에서 '전'이 붙은 침소 중 고종 때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유일한 건물입니다.

자경전 동쪽에 딸려 있는 누마루입니다. 이름은 맑고 한가함또는 조촐한 연회 라는 뜻입니다.
원래 세종 때에 지었으나 그 때는 자미당과 나란히 있었던 누각의 모습이었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왕족들의 부인들을 불러 잔치를 열기도 하고 인종이 이 곳에서 승하하는 등의 활동들을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불타고 고종 시기 경복궁을 중건할 때, 옛 자미당 터에 자경전을 크게 지으면서 청연루는 자경전의 누마루가 되었습니다. 이후의 역사는 자경전과 같습니다.

자경전 서쪽에 있는 담장으로 황토색 전돌과 흰 삼화토를 사용해 만든 벽면에 각종 길상문자와 길상도안, 기하학적 문양을 장식했습니다.

자경전 내부의 온돌방과 연결된 여러 개의 굴뚝을 하나로 모아 만든 굴뚝입니다. 전돌을 쌓아 만든 담장 벽면의 중앙에는 장수를 의미하는 소나무·거북·사슴·불로초 등의 십장생과 그 밖의 각종 길상을 상징하는 동물들을 배치해 자경전의 주인인 대왕대비 조씨의 만수무강을 기원했습니다. 미학적 가치가 뛰어나 1985년 1월 8일 보물 제81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굴뚝만 독립적으로 지정되었습니다.
흥복전

경복궁의 대비전 중 하나로 교태전의 후원인 아미산의 북쪽에 있습니다.
경복궁 창건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1868년(고종 5년) 경복궁을 중건할 때 처음 세워졌습니다. 완전히 새 건물을 지은 건 아니고,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았던 창의궁의 함일재를 옮겨 지었다고 전합니다.
경복궁 중건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강녕전, 교태전 등 내전의 주요 건물들이 2차례에 걸쳐 불타 없어지자 임금이 사용하면서 경연, 신하들과 외국 공사를 만나는 등 공식적인 업무와 행사를 하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이후 효명세자의 부인이자 고종의 양어머니 신정왕후 조씨가 머물렀고 1890년(고종 27년) 4월 이 곳에서 승하하였습니다.
문화재청은〈경복궁 복원 2차 계획 사업〉의 일환으로 2015년 9월부터 2018년 12월까지 총 174억원을 들여 약 3년 3개월에 걸쳐 복원 공사를 진행하였고 2019년 7월에 공개하였습니다. 정식 개방은 2020년. 단청은 아직 칠하지 않았는데, 계획대로라면 2020년대 초중반에 모두 마칠 예정이었지만 단청 연구를 한 뒤 2022년 이후에 칠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동궁
자선당,비현각,계조당

경복궁의 건물로, 왕세자와 왕세자빈이 머무는 동궁의 처소입니다. 그들도 사람이니만큼 먹고, 자고, 입고 쉬면서 여러 활동을 하는 자신만의 생활공간이 당연히 필요한데 이 곳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자선은 착한 성품을 기른다는 뜻으로, 중국 북송 때 황태자의 강학소로 설치되었던 자선당에서 유래했습니다.
조선 초, 중기엔 정전 근정전의 동쪽에 있었으며 고종 때 중건한 이후 현재는 편전인 사정전의 동쪽에 있습니다.

1923년 자선당 건물이 불탄 뒤, 자선당의 기단은 불에 그을린 채 오쿠라 호텔 한 구석에 방치되어 있었고 1970년대엔 아예 정원석으로 쓰였습니다. 그러다 1993년 김정동 목원대학교 명예교수가 찾아내어 반환을 위해 노력한 끝에 1995년 12월에 경복궁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때 문화재관리국이 삼성문화재단에게 무상으로 기증을 받는 형식을 취했습니다.
원래는 자선당 복원 때 활용하려 했지만 손상이 너무 심해 경복궁 건청궁과 녹산 사이에 놓아 보존하고 있습니다.

경복궁의 건물로, 왕세자가 업무를 보고 공부를 하는 동궁의 전각입니다. 쉽게 말해 공부방 겸 사무실입니다. 조선 초, 중기엔 동궁의 처소인 자선당의 북쪽에 있었으나 고종 때 중건한 이후 현재는 동쪽에 위치해있습니다.

경복궁의 건물로, 동궁의 정당입니다.
조선 초, 중기엔 경복궁의 동문 건춘문 안쪽에 있었으나 고종 때 중건한 이후 근정전 마당의 동쪽, 동궁 영역 중 제일 남쪽에 위치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사라졌고, 한 때 빈 터로 남아있었습니다. 그러다 2020년에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는 2022년까지 3년간 총 82억 원을 투입해 계조당을 복원하고 동궁을 정비할 계획이라고 밝혔고 2021년 현재 복원 공사 중입니다.
경복궁이 얼마나 대단하고 아름다운 궁궐인지를 알수 있습니다. 흥성대원군이 재건한후 훼손이 안된 경복궁이 그당시에 높은건물이 없던 한성에서 엄청난 규모로 왕실의 권위를 과시 하였을지가 상상을 해봅니다.
下에서는 내전권역,빈전권역,건천궁 권역 기록이나 사진으로 존재하나 사라진 건물들을 다룰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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